원수라는 것은 사랑의 경계선과 같다.
사랑할 수 없는 경계를 원수라고 부른다.
모두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당연하게 잘 하고있다. 심지어 "난 날 사랑하지 않아" 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그 사람의 행동을 보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더욱 끔찍히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랑의 대상에 대하여 필요에 의해 사랑하게 되는 연인과의 사랑은 서로가 서로에 대하여 가질 수 없는 것들을 상대를 통하여 간접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이고 이것도 엄연히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 사랑하는 것이다.
친구간의 우정에 대해서도 서로 비슷한 것이나 끌리는 주제에 대하여 교류하는 것이며 이것도 자기가 가진 취미나 관심사가 중심이 된다.
부모 자식간의 사랑도 같은 DNA라는 자기 자신의 중심으로 사랑하는 것이며 입양한 부모 일지 라도 법적인 관계에 대해서 혹은, 자기 자신의 약속과 같은 신의를 통해 생겨난 사랑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인생을 살다보면 미워하는 사람이 생기기 마련이며 심지어 연인, 친구, 부모, 동료가 될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지나가는 사람조차 미워하게 된다. 미워하는 이유는 내가 내 관점으로 상대를 보기에 그렇다.
상대는 날 전혀 미워하지 않음에도 내가 상대를 미워하는 경우가 있는 반면 나는 상대를 미워하지 않지만 상대가 오히려 날 미워하는 경우가 생기기도 한다.
그렇기에 자신의 주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 혹은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만을 사랑하며 살아가지만 그거와는 전혀 다르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
너희가 너희를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면 무슨 상이 있으리요 세리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또 너희가 너희 형제에게만 문안하면 남보다 더하는 것이 무엇이냐 이방인들도 이같이 아니하느냐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
<마태복음 5장 43~48절>
만나기조차 싫은 원수를 예수님은 사랑하라 하셨다. 이것을 수치적인 관점으로 이야기 하신 것 처럼 보였다. 사랑하는 사람끼리 사랑하는 것이 상이 없고 남보다 더하는 것이 없고 특별하게 하는 것이 없다. 라고 하시면서 그것이 사랑으로 의미가 있으나 이게 더욱 커지는 것 없이 한곳에만 머물며 고이게 되는 것으로 언급해 주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자녀된 자로 하나님의 완벽함 같이 우리도 완벽하기를 바라셨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한복음 13장 34절>
예수님의 사랑은 곧 하나님이 우릴 사랑하셨다는 것 아가페의 사랑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더 크게 깨닫게 된다.
하나님이 원수되는 우릴 사랑하는 방법은 자신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십자가라는 고된 방법으로 주셨다.
원수를 사랑하는 것은 십자가를 지는 것과 같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원수를 사랑하고자 한다면 심적으로 굉장히 괴롭다.
그러나 그 괴로움이 십자가를 지는 예수님의 심정이나 육체적 고통과는 비교할 수 없다.
당신 주위에 미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이렇게 묻는 나도 몇 명 생각이 난다.
이래서 미운 사람 저래서 미운사람 그래서 인사도 안하고 지나쳤었다.
이유나 정당성은
하나님이 온전한 것 처럼 나도 온전하고자 한다면 온전한 사람은 원수를 만들지 않는다.
원수를 만들었다는 것은 여전히 내가 날 너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써 예수님을 닮아가는 삶이 되길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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